라이프로그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산을 찾아 - 비엔나 여행 (4)

3. 빛나는 지성의 도시, 비엔나 - 제국의 황혼을 거닐다

비엔나의 상징은 링슈트라세로, 도시 중심을 원형 모양으로 근대적으로 꾸민 것이다.
1857년, 더 이상 외침의 걱정이 없었던 비엔나는 과거 군사 요새를 더 이상 놔둘 필요가 없었고, 그것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근대화를 상징할만한 링슈트라세가 조성되었다. 이것은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변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산물로, 오스트리아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건물이 국회, 비엔나 대학, 시청사, 부르크 극장이다.



오스트리아 입헌 자유주의의 상징, 제국 의회의사당. 덴마크 건축가 테오필 한젠에 의해 1873~1883년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도 국회의사당으로 쓰고 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 더 이상 군주의 절대주의가 아니라 계몽주의에 근거한 오스트리아 자유주의를 상징한다. 1866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패전의 결과 황권이 취약해지자 황제는 타협을 시도하였고, 헝가리가 자치권을 얻어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건설하고,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대폭 양보하여 입헌 정치를 실현하였다.

근처에 있었던 카를 레너 박사의 두상. 경륜있는 사회민주당 지도자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수립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초대 총리이자,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해방된 후 설립된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빈 시청사. 슈미트에 의해 1872~83년 건축되었다. 내가 갔을 때에는 한창 공사중이였다.

슈타츠오퍼와 함께 명성을 자랑하는 부르크 극장. 드레스덴 극장을 건축한 젬퍼에 의해 1874~88년 건축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주로 이곳에서 오페라를 감상하였으며, 오페라 배우 카테리나 슈라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황제 곁에 늘 부재하는 시씨를 대신하여 마음의 벗이 되주었다.
비엔나 대학. 1365년 루돌프 4세의 의해 설립되어, 독일어권 대학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이 건물로는 1873년에 옮겨왔다.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의 상징적 건물의 완결체다. 대학은 앞장서서 자유화를 외쳤으며, 1848년 3월 혁명에서 메테르니히의 반동 정권을 타도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 또한 대학생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면 비엔나 대학의 역대 총장들의 두상이 걸려있다. 비엔나 대학은 오스트리아 인재의 산실로, 이곳이 배출한 지성은 무수하게 많다. 프로이트, 멩거, 슘페터, 아도르노, 브렌타노, 볼츠만, 켈첸, 아들러, 브루크너, 비트겐슈타인, 칼 포퍼 등등. 


굳이 비엔나 대학을 찾아온 이유는, 내 자신이 대학생으로써 세계의 지성을 낳은 대학들을 살펴보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파리 4대학-소르본느를 찾았고(여긴 재학생이 아니면 못 들어간다. 유학중이던 선배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음), 베네치아에서는 수상에 있는 베네치아 대학을 찾았다. 유럽의 대학은 캠퍼스가 아니라 건물만 하나 딸랑 놓여있어 캠퍼스에 익숙한 한국 학생들에겐 어색할 수도 있다.

비엔나 대학과 미술의 혁명가 구스타프 클림트 또한 인연이 있다. 클림트가 이 대학을 나왔다거나 강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비엔나 대학에서 주문한 벽화를 그려 오스트리아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클림트가 그린 <의학>의 일부. 클림트는 비엔나 대학의 의뢰를 받아 <철학> <의학> <법학>의 알레고리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대학과 언론을 비롯하여 당시 오스트리아 지식 사회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기존의 미술에 익숙해있던 이들은 이 그림들을 "음란하고 혐오스러운" 그림이라 공격했고, 이 그림의 가치를 인정한 교육부 장관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끝내 전시를 거부했다. 시대를 앞서 나간 선각자를 당시 상류 사회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자존심을 상한 클림트는 다시는 주문 받은 그림은 그리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찾은 곳은 카페 <란트만>. 비엔나 대학 바로 옆에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무수히 많은 유명인사들이 단골로 찾은 곳이다.

비엔나는 유독 카페 문화가 발달했다. 원래 비엔나를 공격한 오스만 군대를 통해 커피가 가장 먼저 유럽으로 전해진 곳이기도 하거니와, 19세기 이후 비엔나의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내노라하는 지성들이 와서 논쟁을 벌이는 문화계의 최첨단이었다. 오늘날에도 비엔나 시민들은 카페를 즐겨 찾는다.

기왕이면 프로이트가 늘 앉았다는 자리에 앉고 싶었는데,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카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아쉬운대로 빈 자리에 앉았다. 비엔나에 온 이상 케이크와 커피는 꼭 먹어야지! 커피는 비엔나에서 맛볼 수 있는 아인슈페너. 이건 여담이지만 프로이트는 블랙 커피를 즐겨 먹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머리를 쓰려면... 실제 그 시대 사람들은 거의 블랙으로 즐겨마셨다고.

이 사람들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잡담 외에도 정치적, 문화적 토론을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100년전에는 이곳에서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이 정신분석학에 대해 토론하고, 좀 더 많은 유명인사가 다녔던 카페 첸트랄에서는 클림트와 에곤 쉴레가 미술의 미래에 대해 논했을 것이며, 트로츠키와 빅토르 아들러가 체스를 두면서 사회주의의 전망에 대해 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현장들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살아 숨쉰다.

케이크를 먹자 자허 토르테 생각이 났다. 비엔나의 케이크라면, 자허 토르테를 지나쳐 간다면 섭한 일이 아니겠는가? 황제가 먹었다는 그 자허 토르테를 사러 자허로 자리를 옮겼다.

<자허>의 내부 모습. 황제에게 납품했다는 전통의 명가답게, 슬쩍 보기만 해도 대중적인 란트만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벽면에 걸려있는 황제의 초상화를 비롯해서, 전체적으로 귀족적인 분위기.

자허 토르테의 원조 답게, 자허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케이크를 판매한다. 원한다면 한국까지 국제 배송도 시킬 수 있다(물론 배송료를 고려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듯하다). 이곳은 특히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다고 하는데, 내가 갔을때도 일본인이 많이 있었다.
내가 당장 먹을 한 조각을 사고, 부모님도 드실 수 있게 중간 크기의 케이크를 샀다. 한 조각 베어물때, 입가에서는 천상의 하모니가... 역시 명불허전! 오오 자허 토르테 오오... (이 글을 쓰다보니 새삼 먹고 싶어진다. 한국에서도 팔면 얼마나 좋을까)

덤으로 이곳은 친구가 가본 카페 <게르슈트너>. 1847년이란 단어와 K.U.K란 단어가 인상적이다. K.U.K 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축약어로 Kaiserlich und königlich(카이저라이히 운트 쾨니히 라이히)를 의미한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의미하는 말로, 세계사에서 드물었던 이중 왕국을 상징함과 동시에 과거 오스트리아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곳에서도 다양한 케이크를 판매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네 그려.


비엔나의 카페를 떠나, 석양이 진 거리를 걸으며, 제국의 황혼을 반추한다. 무수히 많은 지성이 명멸한 시기, 서서히 찾아오는 종말을 왈츠를 추며 기다리는 "즐거운 종말". 수많은 모순이 공존하였기에 오히려 더 후대의 관심을 끄는 그곳, 비엔나. 내가 여행을 통해 가장 즐거운 것은 바로 책에서만 보았던 그 역사의 현장에 내가 직접 가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길 위에서도, 역사는 창조되었고 그 길은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회고적인 추억에 빠진 나에게 있어 비엔나는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비엔나이며 수많은 창조자들의 도시 비엔나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프라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 기회가 된다면, 다음 번에는 이 여행에서 가보지 못한 곳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와 보스니아 등을 여행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투어>를 한번 해볼까 한다. 어떤 곳에서는 문화의 창조자였고, 어떤 곳에서는 민족의 압제자였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모순으로 가득 찬 허상의 제국. 한때 하나의 나라였지만 지금은 10여개가 넘는 나라로 계승된 나라. 100여년전 수많은 다양성이 공존하며 살아 숨쉬던 "즐거운 몰락" 의 현장에 다시 한번 가고픈게 나의 소망이다. 


비엔나 여행전에 읽어보면 좋을 책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와 문화사의 재발견- 윌리엄 존스턴, 글항아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성사를 다룬 놀라운 책. 본인이 이 책 읽고 이중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중 제국의 지성사를 총망라하고 있다.
비엔나 : 천재들의 붉은 노을 - 칼 쇼르스케, 생각의 나무. - 세기말 비엔나의 문화사를 다룬 책.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 - 프레더릭 모턴, 주영사. - 황태자 루돌프는 어째서 자살하였나? 소설 형식으로 다룬 역사 이야기.
석양녘의 왈츠 : 제국의 붕괴와 1차 세계대전의 발발 - 프레더릭 모턴, 주영사. - 앞의 책의 후속작. 제국은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으며 왜 1차 세계대전은 일어났는가?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 앨런 재닉· 스티브 툴민, 이제이북스. - 세기말 비엔나의 지성사를 다룬 또 다른 책.
제국의 종말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48-1918 - 타임라이프 북스, 가람기획.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비엔나 워킹 투어 : 중세의 골목길에서 만나는 영광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낭만 - 정준극, 한울. - 비엔나의 역사와 함께 하는 여행 가이드북.
빈이 사랑한 천재들 : 클림트에서 프로이트까지 - 조성관, 열대림. - 비엔나가 낳은 여섯명의 천재를 다룬 책.
클림트, 황금빛 유혹 - 신성림, 다빈치. - 비엔나가 배출한 천재 화가, 클림트의 생애를 담은 책.
비엔나 칸타빌레 - 곽정란· 유강호, 삼성출판사. - 음악으로 살펴보는 비엔나 여행.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산을 찾아 - 비엔나 여행 (3)

2. 음악의 도시, 비엔나 - 한 겨울밤의 오페라를 만끽하자!

비엔나 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바로 음악의 도시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비엔나에서 키워내고 비엔나에서 활동한 음악가의 수는 과장 좀 보태서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에게 비엔나 만큼 행복한 곳도 없을 것이다.
음악 뿐만 아니라, 빈필이 태동하게 했던 국립 오페라단(슈타츠오퍼)은 세계 3대 오페라로 손 꼽힌다.
비엔나까지 와서 밤에 아무것도 안 하고 일찍 숙소로 들어가는 것은 가장 후회할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같이 주머니 사정 가벼운 배낭 여행족에게 가장 저렴한 문화생활 향유는 무엇일까?

바로 다름 아닌 슈타츠오퍼의 오페라 관람이다. 세계 3대 오페라단으로 손 꼽힐 정도이니, 비싸지 않겠느냐고? Kein Problem. 우리처럼 주머니 사정 가벼운 이들을 위하여 비엔나 당국은 단돈 3.5 유로에 입석을 판다. 커피 한잔 가격도 안되는 가격이다. 유럽은 문화를 일종의 국민 복지 개념으로 보는 사회민주주의적 사고가 발달했고,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오스트리아에서는 학생들과 저소득층을 위하여 저렴한 표를 판매한다(가보지는 못했지만 부다페스트는 더 싸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비엔나는 이미 1차대전 직후부터 사회민주주의가 집권하여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천한 선구적인 복지 도시이다. 그게 무려 1920년대의 일로, 이 시기를 붉은 비엔나(Die Rotes Wien)이라 부른다. 
입석이라고 해서 자리가 나쁠 것고 없고 오히려 정중앙이다. 두시간 이상 버텨줄 튼튼한 다리와 체력만 있다면 비엔나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오페라를 상당히 선호하는 편이다. 서양근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오페라만큼 서구 부르주아 문화의 정수가 없다.
오페라 자체는 귀족에 의해 출발한 것이지만, 오페라를 가장 향유한 계층은 부르주아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 있어 오페라만한 것도 없고(대표적으로 베르디와 바그너), 또 오페라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쓰기 때문에 나같은 역사 덕후에겐 흥미로운 소재다.  

관광을 마치고, 밤이 되자 입석표를 구하기 위해 국립오페라 극장(이하 슈타츠오퍼)에 갔다. 입석표를 사기 위한 줄은 상당히 길었다. 이 사람들, 이게 매일 있는 일텐데도 매진될 정도로 오페라를 본단 말인가! 신선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내부 모습. 입석의 시야는 상당히 좋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의 모습. 자리가 꽉 채워졌다.

한가지 놀라웠던 점은, 입석의 절반 이상이 한국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한국인이 얼마나 많길래 입석 자리를 모두 차지했나? 싶었는데, 단체 관광을 온 사람들이었다.

박스석의 모습. 과거에는 귀족을 위한 공간으로, 박스에는 이름이 모두 정해져있었다. (파리 가르니에서는 박스석에서 봤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입석이 훨씬 시야가 좋다)

이날 공연은 <베르테르>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오페라로 옮긴 작품이다. 원작은 독일어지만 프랑스 작가인 쥘 마스네가 오페라로 개작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어로 공연할듯 싶겠지만 이곳은 비엔나인지라 독일어로 공연을 했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언어를 모른다면 오페라가 재미없을 수 밖에 없다. 한가지 해결점이라면 좌석 뿐만 아니라 입석의 앞에 번역을 해주는 기계가 있다는 것. 독일어와 영어가 동시에 나온다. 언어를 모른다면 물론 배경이라도 알고 봐야 재미있다. 내용도 모르는데 언어도 못 알아 듣는다면 오페라는 인간 수면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단체로 온 한국관광객들은 이 점이 문제였는지 1막이 끝나자마자 전부 돌아가서 입석 자리가 텅텅 비었다. 나 같은 경우엔 원작을 읽어봐서 그럭저럭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끝나고는 얼마든지 사진 찍어도 좋지만 공연 중에는 절대 촬영 금지! 끝나고 나온 주인공 커플의 모습. 원작의 18세기가 아니라 현대의 모습으로 담았다. 공연이 시작하자 베르테르가 너무나 당당하게 가죽 잠바에 청바지 입고 등장해서 웃음이 나왔다.

베르테르가 장렬하게 죽지 않고 너무 코믹하게(?!) 죽어서, 비극답지 않게 사람들 모두가 웃었다. 넉살 좋았던 주인공.
많은 웃음을 주었던 베르테르가 곰인형을 들고 나와서 또 한번 웃겨줬다. 피범벅이 된것과 달리 베르테르는 끝까지 웃겼다.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가 없었던 작품.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슈타츠오퍼의 야경 모습. 빅토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잘 만들어진 건물인데, 당시 황제와 대중은 이 건물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한다. 이에 좌절한 건축가가 자살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날의 경험은 대 만족이었기에, 나와 친구는 그 다음날에도 또 슈타츠오퍼로 가기로 했다.

다음날의 공연은 발레로, 너무나 잘 알려진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끼 인형>.

슈타츠오퍼 내부의 모습. 전쟁의 화마는 슈타츠오퍼도 피해가지 않았다. 전후 비엔나 시민이 앞장서서 제일 먼저 복구한 건물이 바로 슈타츠오퍼다.







발레다보니까 오페라보다는 좀 더 경쾌하고 발랄했다. 역시 무대는 현대로 옮겨놨지만, 작품 자체가 몽환적인 분위기라 시대 구분따윈 무의미할듯 싶다. 특히 중간에 호두까끼 인형과 쥐가 싸울 때 광선검 -스타워즈의 그것- 을 들고 나와 싸워서 또 한번 큰 웃음을 줬다. 비엔나 오페라는 아무래도 유머 감각이 뭔지 아는듯 싶다.

해가 짧고 밤이 길어 더욱 아쉬운 비엔나의 겨울밤, 커피 한잔 보다 싼 오페라로 비엔나의 흥취를 느껴봄이 어떠신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산을 찾아 - 비엔나 여행 (2)


1편에 이어, 이번엔 합스부르크 왕가 최대의 궁전인 쇤브룬 궁(Schloss Schönbrunn)으로 향한다.

1월 9일 오전, 빈 교외에 있는 쇤브룬에 간다. 날씨가 좋았던 어제와 달리 이 날은 심히 우중충한 날씨였다.


 원래는 이런 분위기여야하나...

현실은 이렇다. 을씨년스러운 것이 마치 제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듯한 분위기다.

... 으음, 뭐, 어차피 내부를 구경하려고 온 것이지 외부는 아무려면 어떤가! 신경쓰지 않고 입장하기로 한다.
쇤브룬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특히 오스트리아의 국모로 칭송 받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엄밀히 말하면 여왕이라 부르는게 맞다.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가 사랑했던 곳이다.
합스부르크의 여러 궁전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1500 여개에 육박하는 방 중에서 공개된 것은 채 50개가 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쇤브룬 궁전의 내부 촬영은 금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 아쉽긴하지만 규칙은 규칙이니 지켜주자.  

쇤브룬에 들어가면 맨 먼저 맞이하는 곳은 근위병의 방이다. 화려한 군복이 19세기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모습이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은 특히 화려한 군복과 멋진 매너로 무장한 장교를 자랑해 그 어느나라보다 군대의 인기가 좋았다. 그에 비해 전쟁의 결과는 형편 없었다. 보오전쟁에선 프로이센에 참패했고, 1차대전 때는 러시아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역시 멋에 살고 멋에 죽는 오스트리아인!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였던 당구. 근면성실하고 재미없기로 소문난 프란츠 요제프지만 가끔 당구는 쳤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쇤브룬 집무실. 마누라 덕후 애처가를 상징하듯 여기에도 시씨의 초상화가!

황족들도 사람이기에 먹는 것만큼이나 배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곳은 황제의 화장실.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보수적이었던 황제는 근대식 물품이라는 것을 신용하지 않았다. 정작 비엔나는 근대적 외관 공사를 통해 근대도시로 탈바꿈했는데, 궁에서는 하다못해 전기조차 황제가 죽은 1916년에야 설치될 정도였다. 화장실도 전통대로 구식 화장실을 썼는데, 시씨가 수세식으로 바꾸자고 바가지를 긁은 애교를 떤 다음에야 근대식 화장실로 교체했다.
 
시씨의 공부방. 시씨는 시인 하이네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시를 통해 군주제와 귀족들을 조롱했던 자신이 시대에 앞서갔다고 생각한 시씨의 유언에 따라 사후 60년 후에야 시가 공개됐는데, 높은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한다.

시씨의 드레싱룸. 전편에 언급했지만, 시씨는 자신의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다. 오늘날 소녀시대 저리가라다.

황제 부부의 침실. 결혼 첫 해부터 사용한 방이라 한다. 이곳에서 시씨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딴 방이다. 나폴레옹 3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릴적 초상을 기증했다고 한다. 황제 부부의 저녁 식사 공간. 스무살 무렵의 풋풋한(?) 프란츠 요제프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아니 도대체 쇤브룬에 와서까지도 황제와 황후는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 뿐이냐... 하고 투덜대던 차에 등장한 황색의 방. 오스트리아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 로트링엔의 프란츠 대공(신성로마 황제로서는 프란츠 1세)이 결혼 초기에 사용했던 방이라 한다. 로코코 양식의 아름다움!



이곳에서 여섯살의 음악 신동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보는 앞에서 공연을 했고, 공연이 끝난 직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키스를 하며 청혼을 했다고 한다. 꼬마 천재의 호기(?)가 대단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신동을 손자처럼 귀엽게 봐주었다고 한다.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정말 이 둘이 결혼했더라면 둘 모두에게 실제 생애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 확실하다. 프랑스 국민들도 좀 더 행복했을테고.

크의 천장 프레스코화에 크기는 밀리나, 화려함이란 측면에선 더 한것 같다.

중국식 살롱.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동양적 취향이 있어서, 중국식으로 방을 꾸미는 걸 즐겼다고 한다. (18세기에는 중국식이 유행했다. 예를 들어 베르사이유의 일부도 그렇고, 상 수시와 드레스덴 궁의 일부도 이렇게 구성되어있다) 이 방에서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제 카를 1세가 퇴위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방. 빈은 1805년과 1809년 두 차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특히 1805년 빈 근교에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 생애의 최대 승리였다. 몇년 후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하고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을 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그 사이에 태어난 어린 나폴레옹 2세는 비엔나로 옮겨져 오스트리아의 왕자로 양육되었다. 나폴레옹은 "그 녀석이 오스트리아의 왕자로 자라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를 닮아 영민하였으나 오스트리아의 감시 속에 우울증 속에서 21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붉은 방. 이 방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계자인 '개혁군주' 요제프 2세, 레오폴드 2세, 그리고 그 후계자인 프란츠 2세의 초상화가 그려져있다. 프란츠 1세는 상술했다시피 나폴레옹의 장인으로, 꽤 시대착오적인 반동군주였다. 자신의 덜떨어진 후계자들과 달리 총명한 나폴레옹 2세를 총애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화려한 침대. 1830년, 이곳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태어났다. 이때만 해도 황제의 차남의 아들로 후계순위는 낮은 편이었지만, 1848년 혁명의 여파 속에서 즉위, 무려 68년을 군림하였다.

화려한 쇤브룬 궁을 보다가 눈이 돌아갈 지경. 궁전을 나와서, 모차르트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엔나로 돌아가 호프부르크 궁전의 보물실로 갔다. 어제는 마침 화요일로 쉬는 날이라 오늘 올 수 밖에 없었던 것. 이 곳은 사진 촬영이 허가되는 듯 싶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관과 황제 예복. 1806년부터 1918년까지 프란츠 1세, 페르디난트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1세 네명이 이 복장을 갖췄을 것이다.

오늘날 비엔나의 모습을 보면, 과거 대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번영하는 부자나라이지만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한 때 오스트리아는 전 유럽을 호령하던 강국이었으며, 그 흔적은 비엔나의 이곳저곳에 많이 남겨져 있다. 비엔나에 여행을 가시는 분이라면 꼭 한번 살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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